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막달레나 (문단 편집) == 예수의 제자 == 현재의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제자였으며, 예수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연인이나 부인이였다는 상상을 펼치는 경우도 있지만, 학계에선 지지받지 못한다.[* 「예수는 미혼자로 살았다. 자기 가정 이루기를, 아내와 자녀 두기를 포기했다. 당대 유다교계에서는 이런 처신이 한심한 충격적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거의 의무적인 계명으로 여겨졌다. 근거는 [[창세기]] 1,28이었다: "자식 낳고 번성하라." 랍비들의 유다교계에서는 독신자란 혈통을 망각하는 자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미혼자를 랍비로 서품하기를 피했다. 쿰란에만 독신으로 사는 [[수도자|수도승]]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태오 19,12에 어느 모로 보나 예수의 독신과 관련되는 로기온이 전승되어 있다. 백성 앞의 혼인교시와 연결지어 예수는 독신의 가능성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친다: "사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분류법에 따라 구성된 이 말씀은 ― 고자가 되는 세 가지 경우를 꼽는데 ― 두 가지 점에서는 날카로움을 띤다. 우선 한 가지는 고자라는 멸시적 개념, 혼인할 수 없도록 거세됨을 가리키는 개념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거세는 신명 23,2 이하; 레위 22,24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는 흉측한 짓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말씀에 따르는 결론인즉 가치전환이라는 점이다. 처음 두 경우에는 외적인 불운으로 말미암아 신체적인 생산불능이라는 한스런 상태에 이르게 된 그런 일을 말하는데, 셋째 부분에서는 고자가 자의로 받아들인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런데 욕설 같은 인상을 주는 고자라는 개념이 그냥 남아 있고 보면, 이 대목이 예수를 향한 공격과 관계가 있다는 추정은 적확하다. 예수는 미혼자로 살기 때문에 적수들한테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으니, 세리와 창녀와 죄인 들하고 어울려 먹는 바람에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방을 덮어쓴 것과 한가지다{{{-2 (마태 11,19//)}}}.」 {{{-2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2, 234-235쪽)}}} ]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과 예수를 매장할 때, 그리고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모두 등장하며, 특히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첫 증인이란 점을 4 복음서가 공통으로 증언한다.[* 다만 '빈 무덤'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첫 증인에 대해서는 묘사가 성경의 각 책마다 다르다. 마태오와 요한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코에 의하면 11사도, 루가와 1고린에 의하면 베드로가 첫 증인이다. 신약학자 Gerhard Lohfink에 의하면 이는 예수의 체포 후 11사도들이 갈릴래아로 도주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1. 예루살렘에 남은 마리아 막달래나는 빈 무덤을 최초로 발견했고 2. 갈릴래아로 도주한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를 최초로 만난 후 동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으며 3. 다시 뭉친 전체 제자단이 빈 무덤 증언과 부활 증언을 함께 나누며 극도의 종말론적 기대가 공동체를 압도하는 가운데 4.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를 널리 알린 사람으로''' 교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4복음서에서는 이 예수의 부활 시점을 제외하고는 그녀에 대한 내용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을 당시엔 현 기독교의 모체인 [[베드로]] 중심의 교회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중심으로 하는 몬타누스, [[영지주의]] 교회가 치열하게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고 '예수의 연인설'은 몬타누스주의 교회와 영지주의 교회가 주장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성 마리아 막달레나 중심의 교회종파가 아닌 성 베드로 중심의 교회종파를 선택하여 막달레나 중심의 종파는 박해를 심하게 받았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중요한 위치도 축소, 삭제, 변질되었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할이 중요하게 서술된 마리아 복음서, 필립보 복음서는 사장되다시피하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할이 축소된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는 권위있는 성서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역사적으로 틀렸다. 몬타누스파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다. 몬타누스파가 마리아 막달레나 중심 종파였다거나 몬타누스파가 연인설을 내세웠다는 주장은, 한국은 물론이고 영어권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지주의에서 연인설을 주장했다는 것도, 마리아 복음서와 필립보 복음서의 내용이 와전된 것이다. 마리아 복음서와 필립보 복음서가 [[12사도]]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와 더 친근했다고 서술했다고 하지만 연인이라고 가정할만한 근거는 없고 성서학자들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는 것을 반대하고 여성도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서술로 본다.[* 크레이그 에반스의 <만들어진 예수>] 마리아를 중요하게 묘사하는 복음서들은 교회에서 공인된 복음서들보다 형성시기가 늦어서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신약성경]]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들은 초기 공동체 시절 [[12사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초대 교부들의 견해뿐 아니라 현대 성서비평학적 관점에서도, [[예수]]의 실제 삶과 행적과 어록, 그 주변의 관계들에 대한 역사성이나 진실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외경은) '''경전에 속한 문헌들보다 후대의 것으로 왕왕히 이 문헌들의 모작일 뿐이며, 일반적으로 옛 역사 전통을 하나도 담고 있지 않다.'''[* [[가톨릭]] <주석 성경>의 '신약성경 입문'] 초대 교부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다가 켈수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반박에서야 나오는데 켈수스의 마리아에 대한 폄하와 일부 교회에서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기록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3~4세기 무렵 교부들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복음서에 나온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루카 복음서]]에서 죄지은 여인 이야기 2절 뒤에 일곱 마귀 들린 마리아 막달레나를 언급하는 데다 하스킨스에 따르면 당시에 막달라라는 마을이 부정과 방탕으로 악명 높아서 생겨난 오해다. 게다가 베타니아의 마리아와도 혼동됐는데, 로마의 [[히폴리토]]가 그 예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언니 마르타와 [[예수]]를 찾았고 순종을 통해 [[하와]]의 불복종을 보상하는 제2의 하와이며 다른 여인들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일렀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도 [[요한 복음서]]에서 향유를 부었기 때문에 이런 혼란에 부채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반박은 있었고 한술 더 떠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2명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일시에 반박은 하지 않았고, 그저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칭찬했다. 591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부터 죄지은 여인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또한 그레고리오 1세는 일명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죄지은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중세에선 성적 타락이라고 보았고, [[매춘부]]나 [[간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마리아에게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것을 [[칠죄종|7대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레고리오 1세는 "사도들이 떠났을 때도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에 남았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찾아 (부활한) 그리스도를 본 유일한 여자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에게 사도 대우를 할 것을 선언할 때 그레고리오 1세에게 "자비의 증인(witness of Divine Mercy)"이라고 불렸음을 말했다.[[https://www.ewtn.com/catholicism/library/first-witness-of-the-resurrection-2194|링크]].] || [[파일:Maryofegypt.jpg|width=100%]]|| [[파일:8289c5748e6acff759f2cda8b11eaf6d.png|width=100%]]|| ||<#ffffff><:>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성 조시마와 만났을 때 헝클어진 머리로 알몸을 덮었다.||<#ffffff><:>안토니오 비바리니가 묘사한 마리아 막달레나|| 거기다 창녀였다가 회개한 [[이집트]]의 마리아의 [[사막]]에서 고행하는 금욕주의자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이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참회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매춘부]]에 죄인이라는 것이 부정적이지만 중세 기독교 관점에서는 회개가 중요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이미지였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크게 공경받는 [[성인(기독교)|성인]]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마리아를 칭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뿐만 아니라 그 무렵 신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는 칭호를 받은 죄인"이라고 했다.] [[파일:fdc3a64fc86dc9257db3d6b444df9d26--marie-madeleine-maria-maddalena.jpg|width=200]]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유했다는 설 역시 [[중세]] 시대에 나왔고[* 중세 초기엔 고귀한 성인들 이야기가 유행이었고, 마리아는 부유한 정도가 아니라 귀족으로 묘사됐다.] 속세의 부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른 여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12세기 신학자 호노리우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달라에서 부유한 귀족 유부녀였고, 간통죄를 지었으나 회개하였다"고 했다. [[정교회]]에선 복합인물 마리아 막달레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저 [[예수]]의 제자로 보았으며, 처녀라고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마리아, 죄지은 여인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반박이 다시 나오지만 정설로 굳어지지는 못한다. [[종교개혁]]으로 공경받는 [[성인(기독교)|성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성인 공경을 못마땅해한 [[개신교]]의 비판 대상이었고 그 반동으로 [[가톨릭]]에서는 '참회자' 이미지를 더욱 밀어주었다. 대신 그리스도를 도운 여인이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는 약해졌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죄지은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별개의 인물임을 선언하고,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드디어 마리아 막달레나가 중요한 사도의 역할을 했다고 인정했으며, 이어 2016년 6월 3일 교황 [[프란치스코(교황)|프란치스코]]는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의무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 조치는 마리아의 지위를 사도와 동급의 위치에 놓는 것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뒤늦게 사도급으로 인정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복권을 시작으로 여성 [[부제(성직자)|부제]](副祭) 연구위원회를 설립하고 교황청 부대변인에 평신도 여성을 임명하는 등 가톨릭 내부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전통적으로 비공식 사도였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여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는 칭호를 준 것이지, 사도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이건 정통성 문제인 [[사도전승]]과 관련이 있고, 여성 사제 허용 여부 문제와도 얽혀 있어 한동안은 사도급이 아닌 사도로 인정받기는 힘들다. 다만 이런 변화는 어디까지나 '''[[가톨릭]] 한정'''이며, [[개신교]]를 비롯한 다른 기독교 종파에서는 아직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은 마리아가 복합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대 개신교에선 다 별개의 인물이라고 본다. 생명말씀사 [[개역개정판]] 주석에선 막달라 마리아만의 행적을 강조하며 다른 해석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나온다. 정황상 마리아 막달레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에 놓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밖을 다닐 수가 없고, 남편이 있다면 남편을 두고 [[예수]]를 따라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4복음서나 마리아 복음서 등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남편에 대한 서술이 나오지 않는 것 또한 그녀가 과부였을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 마리아가 예수에게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을 봤을 때 나름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한 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마녀사냥]] 당시에는 이런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과부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당연히 과부가 가진 재산을 노린 모함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한편으로 그녀는 나름 교양과 지적 능력을 갖춘 여성이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후 3일 만에 [[부활]]했다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그녀의 주장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후에 마리아 복음서까지 쓰여진 것을 보면,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에도 그녀는 초창기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인]] 사회는 여성차별이 극심한 곳이었고 마리아처럼 예수를 따르거나 그를 지원하던 여성들 역시 적지 않았는데, 그녀가 정말 별볼일 없는 여자였다면 결코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전술한 것처럼 과거 [[가톨릭]]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인물로 잘못 규정하였으며, 중세 이후에는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지금의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주해서 선교하며 살았다는 등의 전설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반면 가톨릭과 별개의 전승을 갖고 있는 [[동방정교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부활 후 [[성모 마리아]], [[사도 요한]]과 함께 에페소[* 현재 [[터키]]의 이즈미르 주 [[셀축]].]로 가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거기서 생을 마쳤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 전승 역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다른 가설들과 더불어 일종의 전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